◈ 홍양사(鴻陽祠)

본 사우(祠宇)는 안정나씨(安定羅氏) 일문(一門)에서 충절(忠節), 효행(孝行) 및 학덕(學德)이 뚜렷한 육현(六賢)의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한 사우(祠宇)다. 충청북도(忠淸北道) 청원군(請原郡) 내수읍(內秀邑) 비중리(飛中里) 110-1번지에 소재(所在)하며 1970년에 공사(工事)를 시작(始作)하여 3차에 걸친 국비 도비 군비 보조를 받아 1978년에 완공(完工)하였다. 외삼문(外三門)인 경의문(景義門)으로 들어가면 정면 왼쪽에 홍양사묘정비(鴻陽祠廟庭碑)가 정면 오른쪽에 신묘정비(新廟庭碑)가 있고 마당에는 서재(西齋) 모충당(慕忠堂)만 있고 동재(東齋)는 10여 년 전 철거하였다. 
 
묘정비 오른쪽으로 안정나씨삼세충효비(安定羅氏三世忠孝碑), 충신문(忠臣門), 삼효문(三孝門), 충의비(忠義碑)가 있고, 묘정비 뒤로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내삼문(內三門)인 충의문(忠義門)이 있다. 사당(祠堂)은 建坪 12평에 正面 3칸 側面 2칸의 목조와즙 맞배집이다. 상량문(上樑文)에는 단기 4305년(서기 1972년) 9월 4일 미시(未時)라고 되어있다. 

특히 충신문(忠臣門)과 삼효문(三孝門)은 충청북도(忠淸北道) 지방유형문화재(地方有形文化財) 第41號이며 그 앞에는 정문(旌門)과 夾門이 있다.
모충당(慕忠堂) 뒤쪽 담장 밖에는 현대식 건물의 관리사가 있다.


◈ 안정나씨(安定羅氏) 육현(六賢)


○ 안정백(安定伯) 천서(天瑞)

안정나씨의 시조(始祖)이시다. 고려공민왕 19년(서기1370년) 요동(遼東)의 동녕부(東寧府)를 정벌(征伐)할 때 진무(鎭撫)로 출정하였다. 요성(遼城)을 함락하고 귀환하던 일만오천여명의 군사는 군량미가 바닥나 추위와 기아로 아사 직전에 처하였다. 그때 시조공이 양곡 수 백석을 구하여 군사들을 위기에서 구출하고 무사히 돌아오게 하여 공민왕으로부터 “公이 전쟁을 그만 두게 하였다”는 극찬을 받았다. 그러한 군공(軍功)과 정사(政事)에 진력한 공으로 벼슬은 삼중대광(三重大匡)문하시중(門下侍中)안천군(安川君)안정백(安定伯)에 오르고 안정현(安定縣)을 식읍지로 하사(下賜)받았다.
고려의 국운이 다하므로 아들 합문지후(閤門祗侯) 직경(直卿)을 데리고 고향 안정(安定)으로 낙향(落鄕)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고려(高麗)의 재상(宰相)으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지켜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으로 추앙(推仰)받는 분이다. 
「고려사 열전」「두문동72현록」「해동삼강록」등에 그 절의가 실려 있고, 개성(開城)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정절반(貞節班)과 청원의 홍양사(鴻陽祠) 그리고 파주(坡州)의 고려대전(高麗大殿)에 배향(配享)되었다. 
묘소(墓所)는 경북 의성군 안계면 안정리(慶北 義城郡 安溪面 安定里) 해망산(海望山) 계좌지원(癸坐之原)에 있다.



 
 ○ 충정공(忠貞公) 사종(嗣宗)
 
 字는 광원(光遠)이요 號는 퇴수헌(退修軒)이며 안정나씨 6세로 청주파종중(淸州派宗中)의 中始祖이다. 양산군사(梁山郡事) 유선(裕善)의 셋째 아들이며 할아버지는 죽산현사(竹山縣事) 경손(慶孫)이다. 
성종(成宗)20년(1489) 충청도(忠淸道) 관찰사(觀察使)성준(成俊)의 천거로 선전관(宣傳官)을 배수(拜受)하고 곧이어 경흥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가 되었다. 성종22년(1491) 여진족(女眞族) 별추(別酋) 우지거(于知車)가 이끄는 철기(鐵騎) 일천을 맞아 싸우다가 조산보(造山堡) 전투에서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장졸들과 함께 순절(殉節)하였다. 성종(成宗)께서 공(公)의 충절(忠節)을 가상(嘉尙)히 여기시어 병조참판(兵曹參判)을 내리셨고, 숙종(肅宗) 43년(1717)에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겸(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 대총제(大摠制) 훈련원(訓練院) 훈련대장(訓練大將)에 증직(贈職)되고 충정(忠貞)이라 시(諡)하여 정려(旌閭)를 명(命)받았다. 홍양사(鴻陽祠) 외삼문 우측(外三門 右側)의 홍살문이 바로 그 정문(旌門)이다.
墓所는 청원군(淸原郡) 현도면(賢都面) 매봉산(梅峰山)에 있다.


○ 장음정공(長吟亭公) 식(湜)

字는 정원(正源)이요 號는 장음정(長吟亭)이며 안정나씨 8세이다.
아버지는 지평(持平) 세걸(世傑)이요 할아버지는 경파 중시조(京派 中始祖) 계종(繼宗)이다.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문하(門下)에서 성리학(性理學)을 배웠다. 잠시 선릉참봉(宣陵參奉)에 봉직(奉職)하다가 귀향(歸鄕)하여 당대(當代)의 명현(名賢)들과 도학(道學)을 강론(講論) 교유(交遊)하며 오직 인재양성(人才養成)에 정진(精進)하였다.
원정 최수성(猿亭 崔壽城)선생은 공(公)을 평(評)하여 󰡒도학과 문장이 압동제일(鴨東第一)이다󰡓라고 하였다. 
간배(奸輩)들의 무고(誣告)로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아우 부제학공과 함께 피화(被禍)되어 흥양(興陽)에 유배(流配)되었다가 강계(江界)에서 사사(賜死)되고 선조(宣祖)3년에 아우 부제학공과 함께 신원복관(伸寃復官)되었다.
공(公)이 無男하여 백씨(伯氏) 사직 옥(司直 沃)의 三男 윤례(允禮)로 후사(後嗣)를 이었다.
墓所는 남양주 삭다니(朔端里) 죽산공 선영(竹山公 先塋) 백호등(白虎嶝)에 있다. 


 
 ○ 부제학공(副提學公) 숙(淑)
 
字는 善源이요 號는 정음(淨陰)이며 안정나씨 8世이다.
아버지는 지평(持平) 세걸(世傑)이요 할아버지는 경파 중시조(京派 中始祖) 계종(繼宗)이다.
公은 천자영수(天資英秀)하여 중종(中宗)19년(1524) 문과(文科) 병과(丙科)에 급제(及第)하였다. 
公이 통정대부(通政大夫)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일 때 간신배(奸臣輩)들의 무고(誣告)로 을사사화(乙巳士禍)에 仲兄 장음정(長吟亭)과 함께 피화(被禍)되어 철산(鐵山)에 유배(流配)되었다가 이듬해 경원(慶源)에서 사사(賜死)되고 선조(宣祖)3년에 仲兄과 함께 신원복관(伸寃復官)되었다.
公이 찬(撰)한 증병조참판(贈兵曹參判) 행경흥도호부사(行慶興都護府使) 사종(嗣宗)의 행장(行狀)이 있다.
墓所는 남양주(南楊州) 삭다니 죽산공 선영(竹山公 先塋) 맞은편 언덕에 있다. 묘소(墓所)에는 아주 희귀(稀貴)한 백비(白碑) 즉 글자가 전혀 없는 하얀 비(碑)가 서있다.



○ 구포공(鷗浦公) 만갑(萬甲)

字는 몽뢰(夢賚)요 號는 구포(鷗浦)다. 아버지는 증영의정(贈領議政) 급(級)이고 증조(曾祖)는 한림공(翰林公) 익(瀷)이다.
인조(仁祖) 때 文科에 及第하여 증조로부터 4대를 이어 대과(大科)에 급제(及第)한다. 
公은 성품(性品)이 순수(純粹)하고 강직(剛直)하여 출사(出仕)후에 내직(內職) 외직(外職) 귀향(歸鄕)과 유배(流配)를 수없이 반복(反復)한다.
직간(直諫)으로 파직(罷職)되어 낙향(落鄕)하여 지내던 병자(丙子)년 겨울에 호란(胡亂)이 일어나자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자진(自進)입성(入城)하여 관향사(館餉使)로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국난극복(國難克服)에 큰 공을 세운다. 호란(胡亂) 후(後)에 모함(謀陷)으로 영해(寧海)에 유배(流配)되었다가 용서받고 영주(榮州)에서 卒하다.
정사훈(靖社勳) 등 원종훈(原從勳) 누(累)로 의정부(議政府) 좌의정(左議政)에 증직(贈職)된다.
公의 著書인󰡒병자록(丙子錄)󰡓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墓所는 경기도 구리시 사노리(九里市 四老里)에 있다. 
묘역(墓域)과 신도비(神道碑)는 경기도유형문화재(京畿道有形文化財) 第126호다.

 
○ 명촌공(明村公) 양좌(良佐)

字는 현도(顯道) 號는 명촌(明村)이다. 
아버지는 해주목사(海州牧使) 성두(星斗)이고 할아버지는 증직 좌의정(贈職 左議政) 만갑(萬甲)이다.
노서(魯西) 윤선거(美村 尹善擧)를 사사(師事)하여 문장(文章)과 성리학(性理學)에 통달(通達)하였다. 동춘당(同春堂)송선생(宋先生)이 천거(薦擧)하여 희릉참봉(禧陵參奉) 동몽교관(童蒙敎官) 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 공조좌랑(工曹佐郞) 충청도사(忠淸都事)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 삭령군수(朔寧郡守)를 제수(除授)하나 모두 不就하고 오직 학문과 인재양성에 전심하다가 노서 윤선거(魯西 尹善擧)의 누명(陋名)을 벗기고자 상소(上疏)를 하다가 영변(寧邊)으로 유배(流配)되었다. 69세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拜命하였다.
公은 始祖 안천군(安川君)의 묘비문(墓碑文)을 찬(撰)하였다.
墓所는 경기도 구리시 사노리(九里市 四老里) 조고(祖考) 구포공묘(鷗浦公墓) 아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