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최고 한글편지(보물2023-1호)
발굴장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금고동 발굴시기 : 서기 2011년 5월 2일 소 장 처 : 대전역사박물관 기 증 자 : 안정나씨대종회 보낸 할아버지 : 안정나씨 7세 참봉공 휘 신걸 받은 할머니 : 참봉공의 부인 신창맹씨 (회덕 온양댁) 작성시기 : 서기 1480년에서 1490년으로 추정 보물 지정 : 제2023-1호, 2023년 3월 9일 문화재청 지정
[번역문] 안부를 그지없이 수없이 하네. 집에 가 어머님이랑 아기랑 다 반가이 보고 가고자 하다가 장수(將帥)가 혼자 가시며 날 못 가게 하시니, 못 가서 못 다녀가네. 이런 민망하고 서러운 일이 어디에 있을꼬? 군관 자리에 자망(自望 : 자기를 추천)한 후면 내 마음대로 말지 못하는 것일세.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을 구태여 가면 병조(兵曹)에서 회덕골로 문서를 발송하여 조회하여(照會) 잡아다가 귀향 보내게 될까 하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꼬? 아니 가려 하다가 못하여 영안도(永安道, 咸鏡道) 경성(鏡城) 군관이 되어 가네. 내 고도(古刀. =낡은 칼)와 겹철릭을 보내소. 거기는 가면 가는 흰 베와 명주가 흔하고 무명이 아주 귀하니 관원이 다 무명옷을 입는다고 하네. 무명 겹철릭과 무명 단철릭(=홑철릭)을 입을까 하네. 반드시 많이 하여 설을 쇠지 말고 경성으로 단단히 하여 들여보내소. 옷을 못 미처 지을 것 같거든 가는 무명을 많이 보내소. 두 녘 끝에 토시를 둘러 보내소. 무명옷이 있으면 거기인들 옷이야 못하여 입을까? 민망하여 하네. 반드시 하여 보내소. 길이 한 달 길이라 하네. 양식을 브경이(인명)에게 넉넉히 하여 주소. 모자라지 아니하게 주소. 전지(田地, =논밭)의 온갖 세납이란 형님께 내어 주소 말씀하여 세납에 대해 대답하소. 공세(貢稅, =공물(貢物)는 박충의 댁에 가서 미리 말하여 두었다가 공세를 바꾸어 두소. 쌀 찧어다가 두소. 또 골에서 오는 제역(除役,=면역(免役)) 걷어 모아 채접하여 주거늘 완완히(緩緩) 가을에 덩시리(인명)에게 자세히 차려서 받아 제역을 치라 하소. 또 녹송이야 슬기로우니 녹송이에게 물어보아 저라고 대답하려 하거든 제역을 녹송이에게 맡아서 치라 하소. 녹송이가 저라고 대답하거든 골에 가서 곡식담당 관리에게 많이 달라 하여 하소연하여 청하라 하소. 또 전지(田地, =논밭) 다 소작(小作) 주고 농사짓지 마소. 또 내 다른 철릭 보내소. 안에나 입게. 또 봇논(洑) 모래 든 데에 가래질하여 소작 주고 절대로 종의 말 듣고 농사짓지 마소. 또 내 헌 간 생사로 짠 비단 철릭을 기새(인명)에게 주소. 기새 옷을 복경(인명)이 입혀 가네. 또 가래질할 때 기새 보고 도우라 하소. 논 가래질을 다하고 순원이(인명) 놓아 버리소. 부리지 마소. 구디(인명) 데려다 이르소. 영동에 가서 아뢰어 우리 논 있는 곁에서 경성 군관이 내월 열흘께 들어오니 거기 가서 알아 함께 내 옷 가져 들어오라 하소. 또 반드시 영동에 가서 물어 그 군관과 함께 들어오라 하소. 그 군관의 이름이 이현종이라 하는 바이니 또 내 삼베 철릭이랑 모시 철릭이라 성한 것으로 가리어 다 보내소. 또 분하고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네. 집에 가 못 다녀가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고, 울고 가네. 어머니와 아기를 모시고 다 잘 계시소. 내년 가을에 나오고자 하네. 또 다랑이 순마니가 하는 논에 씨 열여섯 말, 이필손의 논에 씨 일곱 말, 손장명의 논에 씨 다섯 말, 소관이가 하는 논에 씨 다섯 말, 구디지에 하던 논에 씨 다섯 말, 이문지에 논에 씨 여덟 말, 종도리가 하는 논에 씨 여덟 말, 진 구레논에 씨 열 말, 또 두말 구레 밭에 피 씨 너 말, 뭇구레에 피 씨 너 말, 삼밭에 피 씨 한 말, 아래 밭에 피 씨 한 말 닷 되, □ 하는 밭에 피 씨 서 말, 어성개 밑밭에 피 씨 서 말, 허오동이 소작 하던 봇논에 씨 서 말. [봉투] 회덕 온양댁 가인(家人)께 올림 편지 벌써 자세히 즉시 다 받았소. 빨리 보내소. 입사(立四) 수결 1) 군관 : 장수 휘하에서 여러 군사적 직임을 수행하던 장교급의 무관.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장수 휘하에서 여러 군사적 직무를 수행하던 무관을 칭하였다. 신분상 일반 군사와 다를 바 없었다. 2) 영안도는 성종 3권, 1년(1470)에 영안도로 개칭하였으므로 이 편지는 1470년 이후에 쓰여 진 것은 분명함. 3)'立四’는 발신인의 호를 나타내는데, 나신걸의 호일 가능성이 있다. 4)수결은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아마도 편지를 말아서 두 부분이 접합되는 부분을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훈민정음 반포의 생생한 역사, 「나신걸 한글편지」 보물 지정 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한글편지이자 훈민정음 반포의 실상을 알려주는 「나신걸 한글편지(羅臣傑 한글便紙)」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하였다. 보물 「나신걸 한글편지」는 조선 초기 군관(軍官) 나신걸(羅臣傑, 1461~1524)이 아내 신창맹씨(新昌孟氏)에게 한글로 써서 보낸 편지 2장이다. 2011년 대전시 유성구 금고동에 있던 조선 시대 신창맹씨 묘안 피장자의 머리맡에서 여러 번 접힌 상태로 발견되었다. * 나신걸은 조상 대대로 무관직(武官職)을 역임한 집안 출신으로, 편지를 썼을 당시 그는 함경도에서 하급 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음. 그의 부인 신창맹씨의 묘에서 출토된 유물은 저고리, 바지 등 의복 28점, 한글편지를 포함해 13점의 유물 등 총 41점 이상에 달함 편지의 제작시기는 내용 중 1470~1498년 동안 쓰인 함경도의 옛 지명인 ‘영안도(永安道)’라는 말이 보이는 점, 나신걸이 함경도에서 군관 생활을 한 시기가 1490년대라는 점을 통해 이 때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편지는 아래, 위, 좌우에 걸쳐 빼곡히 채워 썼으며, 주된 내용은 어머니와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 철릭(조선 시대 무관이 입던 공식의복) 등 필요한 의복을 보내주고, 농사일을 잘 챙기며 소소한 가정사를 살펴봐 달라는 부탁이다. 이 편지가 1490년대에 쓰였음을 감안하면,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불과 45년이 지난 시점에서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지역과 하급관리에게까지 한글이 널리 보급되었던 실상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 시대에 한글이 여성 중심의 글이었다고 인식되었던 것과 달리, 하급 무관 나신걸이 유려하고 막힘없이 쓴 것을 보면, 조선 초기부터 남성들 역시 한글을 익숙하게 사용했음을 보여 준다. 기존에는 조선 시대 관청에서 간행된 문헌만으로는 한글이 대중에 어느 정도까지 보급되었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면, 「나신걸 한글편지」가 발견됨으로써 한글이 조선 백성들의 실생활 속에서 널리 쓰인 사실을 확인한 계기가 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아울러, 해당 유물은 현재까지 발견된 한글편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자료이자 상대방에 대한 호칭, 높임말 사용 등 15세기 언어생활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앞으로 조선 초기 백성들의 삶과 가정 경영의 실태, 농경문화, 여성들의 생활, 문관 복식, 국어사 연구를 하는 데 있어 활발하게 활용될 가치가 충분하며, 무엇보다도 훈민정음 반포의 실상을 알려주는 언어학적 사료로서 학술적ㆍ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나신걸 한글편지」를 해당 지방자치단체, 소유자(관리자) 등과 적극행정의 자세로 협조해 체계적으로 보존・활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